jms  현) 기독교복음선교회

초창기 지도자 김형만목사의 고백글이네요.......



(2007년도 쯤에 작성하신 글인듯 하네요)


이 설교문은 지금부터 거의 8년전의 내용입니다.

한국에 온 정명석 총재를 생각하며 자료집에서 찾아낸 원본 그대로


무삭제로 올립니다. 이 글을 올리는 저 역시 착잡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그에게 돌을 던졌지만 사실은 내가 돌을 맞아야 할 대상임을 처절히 느끼고 있습니다.


제이엠에스는 어디에고 저에게 따라붙는 꼬리표입니다.


나다니엘 호돈의 주홍글씨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늪에서 벗어날 것인지


모든 애천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질풍노도처럼 치달려 내려갔었던 10여년 전의 분노의 홧김을


채 다스리지도 못했던 저 자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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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보내는 편지


1999년 11월 14일(주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마태복음 12장 33절)



1. 며칠 전이었습니다. 인생의 동반자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아내가 통곡을 하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따스한 아침햇살만이 조그마한 우리들의 방안을 가득 채울 뿐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여 나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우선 그 울음소리가 결혼 후 처음 들어보는 통곡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옆집의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협소한 집이라, 이웃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라디오의 볼륨을 일단 크게 올렸습니다. 아내는 넋을 놓고 마음껏 울고 있었습니다. 가냘픈 그녀의 어깨의 수직움직임이 규칙적이기까지 하면서 그 소리는 절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내가 해줄 수 있던 것은 그녀의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득 담은 얼굴을 내 가슴으로 끌어안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귓전을 스치는 그녀의 소리는 “당신은 억울하지 않아?!”라는 것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광석의 노랫소리에 묻혀서 그녀의 울먹이는 절규는 나의 호흡이 되어 있었습니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는 오늘의 나의 비참함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황금시절을 이렇게 허비하고 말다니! 억울함 정도가 아니라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나의 무분별한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감으로 분노와 증오가 불같이 살라 올랐습니다. 그리고 자책감과 회한의 참담함을 그 어느 것으로도 치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믿고 따랐던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음란의 인간쓰레기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은 우리의 가정을 히로시마의 원폭투하후의 후유증에 비교해 본다면 그것이 가능이나 할까요?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우리의 이 공동체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의 정신을 황폐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일을 하다가도 순간순간 억누를 수 없는 분노의 격류에 통제할 수 없는 우리 스스로의 정체감의 상실은 무엇으로 보상받아야 합니까?



2.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의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중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귀신들리고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친 사건을 두고 예수를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 쫒아내는 자로 비난을 가하던 데에서 예수님이 이를 반박하며 말씀하신 내용(마태복음, 12장 22-33) 중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핵심의 내용은 행동을 보고 말하라는 것이며, 생활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책임지는 말을 하라는 엄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아직도 선생님을 말하며 그가 만든 허위의 틀 속에 갇혀있는 맹목적인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대들은 선생님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냐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에게는 분명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느냐고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엠에스들은 정명석이라는 인간의 이력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 이력을 채 살피기도 전에 신앙의 논리로 신격화되는 과정 속에서 그의 진면목을 놓치고 맙니다. 그는 인간의 성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재림한 그리스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 나타난 육신의 그리스도! 그것도 정씨의 성을 가진 자! 정 도령이 바로 선생님이라고 우길 수밖에 없는 풍수학적 서적의 범람! 이에 편승한 일부 섭리어용 학자의 등장! 이 것 저 것 다 같다가 붙여 놓으니 그것은 我田引水가 되어버리는 격이 되고 맙니다.  



 그는 ‘어거지’ 그 자체였습니다. 자기의 욕심과 실속이 맞아떨어지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시키셔서 하는 일이라고 강변해 왔습니다. 과연 그 동안 우리는 어떠한 열매를 맺어 왔습니까? 선생님을 전혀 바라보지 못하는 분들은 그의 입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만을 접하기 때문에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고 ‘선생님’은 역시 구세주의 사명을 갖고 오신 분이라 그 분의 만 분의 일이라도 따라가야 되겠다고 하며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전달해 듣기만 하면 되지만 그의 몸에 바짝 붙어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그것이 아닙니다.



 어느 여성은 그 곳에서 희망을 기대하고 들어갔다가 망신창이의 몸으로 가까스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녀의 절규의 소리는 지금도 귓전을 맴돌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여러분이 새벽기도의 영성에 몰입해 있을 때, 선생의 주변에서는 섹스의 오르지가 자행되기도 했으며, 본부의 일부 여성들은 신체의 털을 뽑아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본부생활의 일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기도의 거룩한 일상사 대신에 자신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랫도리 이하의 털들을 너도 나도 뽑아내야 했다니요? 그녀가 한 달 동안 매일 그 일만 했다고 하는군요. 이러한 일이 그대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일입니까? 커피, 술, 담배는 물론 콜라와 라면까지 금지식품으로 분류된 것이 이 사회의 좋은 열매가 될 수 있는 본보기입니까? 그러면서 왜 선생님의 포르노보기는 금지되고 있지 않은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나만 깨끗하면 되지 하는 무서운 신앙의 단계까지 도달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선생은 모르겠다. 어떻든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심어 주었고, 예수님을 확실하게 알게 해 주지 않았느냐 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냐 하면서 말입니다. 더욱이 예수의 복음서 구절을 원용하면서 말이지요!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 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한복음, 9:25)


 


대부분의, 선생님이라는 구세주의 목걸이에 매달려 다니는 그대들에게 한결같이 나오는 고백입니다. 더 나아가 월명동의 ‘판자집’(?)에서 그러한 간음행위가 일어날 수가 있겠냐고 오히려 질문까지 던지는 사람까지 합세하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운동하고 말씀 전하는데 여성들하고 섹스할 시간이나 있겠냐는 참 순진한 사람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시간과 장소의 개념이 없는 자였습니다. 이 조직에서는 그 누가 감독하고 통제할 자가 있었습니까? 산 위 팔각정에서도 경호원 세워놓고 간음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이 있던 날에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 월명동 작업이 끝나고 여성들이 죽 양옆에 도열해 있으면 총재전용 목욕실로 걸어가면서 수건과 가운을 걸친 여성들이 뒤따라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한 두 번 목격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피곤한 몸이었지만 다시 이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정욕을 매일 채우지 않았습니까? 월명동의 초기이던 80년대 처음으로 봉고로 청년부 모임이 있었을 때 그 차안에서도 섹스를 즐기지 않았습니까? 그는 변질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음란의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것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이용당했던 우리들의 인생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


 


아예 이 조직의 특성상 절대로 불가능한 전제를 스스로 장치한 자도 있습니다. “나의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 이외에는 못 믿겠다”라든지, “선생님이 자기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전에는 그러한 사실은 사실이 아니다”라든지 혹은 “선생님을 직접 면담해서 선생님의 말을 직접 듣기 전에는 판단하지 않겠다” 라는 기계장치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자는 대개 남자들입니다. 그것도 자기의 판단과 의지가 객관적 현실에 앞서는 무모한 맹신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학대가 매우 강합니다. 전형적인 피해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선생님은 환상입니다. 선생의 정력 강화를 위한 운동(주로 축구경기)시간이나 음식물 나누어 줄 때에 한 번씩 스쳐 지나는 것을 무슨 대단한 영광으로 아는 단순한 구조물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은(선생을 직접 만난다든지, 일대일 면담한다든지 하는 일) 가히 신앙 그 자체가 됩니다. 바로 절대로 불가능한 전제를 조건으로 내거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인에게도 선생의 난잡한 성생활과 그의 자의적인 섭리운영방식을 잘 알지 못했을 때는 선생은 예수님의 역할로 다가 왔었습니다. 새벽기도회, 조깅, 전도, 심방, 말씀강의, 설교, 건축헌금 독려, 지도자 회의, 집회준비, 월명동 노력봉사, 철야기도회, 토요 공개방송, 일일찻집, 바자회, 캠퍼스 심방, 청년부 모임 등등의 스케줄은 선생을 홍보하고 고백하고 교리화 하기에도 부족했습니다. 그를 세밀히 잘 알지 못하면서 금상첨화의 온갖 방법론을 다 동원하여 신격화했으니까요! 그 신학화의 맛에 길들여진 분들이 바로 오늘의 여러분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선생의 이야기가 안 나오면 설문지 돌려 선생님관이 흐리다든지 설교가 너무 어렵다든지, 선생님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한다든지, 본부를 초청해서 말씀을 듣게 한다든지, 초창기 선배를 초청해서 말씀을 듣자고 하든지 별의 별 방법을 동원해서 삼십개론 뿐만 아니라 선생이 은연중에 맛들여 놓은 ‘선생님=구세주’ 공식을 여러분 스스로 만들어 가지 않았습니까? 선생님의 일면만을 바라보고 말입니다. 여성들 중에는 언제 선생님과 성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하면서 학수고대하다가 세월을 날린 사람도 있었고(결국 나갔던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음) 성 관계를 얼떨결에 당하고 심한 정신적 손상을 입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신분상승(?)을 노려 선생님 주변을 노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비리를 숨기고 여기의 닦아온 이 터전이 너무도 좋아서(?)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3. 오늘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실과로 그 나무를 안다’는 마태복음 기자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묻고 그에 대하여 우리의 방향을 결정해야 할 진리의 잣대입니다. 약에는 명약이 있지만 독약도 있습니다. 물론 마약도 존재하지요. 오곡백과가 가을의 들판을 가득 채우는 시절에 여러분들은 월명동의 빨간 감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월명동에서 우리는 어떠한 실과를 맺었습니까? 빨간 잘 익은 단감의 열매였습니까? 아니면 유혹의 마약성분의 열매였습니까? 차라리 독약은 금방 구별이 됩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그래도(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설사 그가 육신의 간음죄 등을 저질렀다고 하여도) 옳지 않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느끼고 크신 은혜가운데 이렇게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매우 중요한 신학적 전제가 여기서 등장합니다. 선생을 재림 메시아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는 이 조직에는 많은 부분들이 위장되어 기독교로 인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대들은(이 글을 쓰는 필자는 분명히 그대들과는 구별되길 바라는 뜻에서 ‘우리’라는 대명사를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음을 알아 주셨으면 한다. 본인은 분명히 여전히 섭리에 당당히 존재하고 있다. 섭리는 하나님의 것이지 정 명석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 간판을 걸고 ‘기독교 복음 선교회’를 내세워 세상에 자신들이 기독교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점에서 많은 위선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바로 당신들은!



 첫째, 열매를 선택할 위치는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실과를 통해 나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행복해 하고 있는 것이 선생의 결정적 역할 때문인지 아니면 그것이 아닌 다른 요소 때문인지를 말입니다. 여러분이 말하고 있는 좋은 열매는 어떠한 것입니까? 앞에서 언급한 금지식품의 준수를 말하는 것입니까? 물론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좋은 열매가 될 수 있지요. 철저한 異性에 대한 차단이 좋은 열매입니까? 축구, 배구 등의 운동을 하는 것이 좋은 열매입니까? 영육의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선생을 알고 그의 사상과 철학을 믿고 따르는 것이 좋은 열매입니까? 여러분의 말대로 하나님을 너무도 심정적으로 잘 깨우치게 된 것, 그리고 예수님과 성령님의 실체를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좋은 열매입니까? 아니면 월명동에서 무보수로 작업활동을 한 것입니까? 몇 년 전 장충체육관에서 어설프게 환경운동 한답시고 몇 명의 대학 청년들이 나와서 모두 오른손을 들고 결의문을 합창한 것이 좋은 열매입니까? 반포고수부지에서 축구운동 실컷 한 후에 쓰레기 줍기 형식적으로 하고 단체 촬영한 것이 좋은 열매입니까? 겨울철 불우이웃 돕기 명목으로 모금통 들고 지하철 등에서 모금 활동한 것이 좋은 열매입니까? 그리고 그 모금액의 대부분을 선생에게 갖다 바친 것이 좋은 열매입니까? 그리고 예쁜 여성만을 전도해서 영적 구원을 받게 하고 동시에 육적 구원(?)도 받게 한 것이 좋은 열매입니까? JMS 이니셜로는 전도가 되지 않으니 소위 ‘국제문화교류’(ICEL) 등의 주변 단체로 등록하여 위장전도 시키는 것이 좋은 열매입니까? 그래서 사회의 명망 있는 인사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을 내세워 이러저러한 사람도 이 단체에 나온다고 자랑하는 것이 좋은 열매입니까? 최근에는 산악회를 조직하게 해서 위와 동일한 목적을 수행하게 했는데 영문도 모르는 청년 대학생들이 대둔산 왔다가 얼떨결에 선생의 말씀설교 듣게 하는 것이 좋은 열매입니까?  


  


 어떻든 선택은 여러분이 하셔야 합니다. 어떠한 열매가 이 조직을 통하여 맺히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열매는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생래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실과는 어차피 우리가 먹어야 하고, 그것은 또한 우리들에게 영양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에너지와 정신의 풍요로움을 분명히 주고 있습니다. 좋은 열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담고 있는 지구촌 마을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에이즈의 감염과 같은 것을 명심하십시오. 선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리가 죽어 천국에 가더라도 우리의 출생신고서처럼 따라 다니는 그 ‘사회’라는 공동체의 본질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면 진정으로 그대들의 正體性(identity)을 묻고자 합니다. “그대들은 누구입니까?” 우리 나라의 유명한 선사이신 경허 스님이나, 만공 스님과 같은 종류의 문답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대들이 철저히 따르고 있는 통일교의 동시성적 섭리 역사의 도표대로(삼십개론에서는 역사론 고급편) 서구 지향의 역사철학의 한 시점에서 등장한 종파를 언급하라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이 천년 동안 형성되어 온 기독교 간판으로 다시 개혁의 선교회를 세웠는데 진정으로 그 기독교의 사상과 철학대로 살아가기로 한 것인지를 묻고자 함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 고백 위에서 조직된 종파입니다.” 그대들의 정체성을 묻지 않을 수 없는 나의 이러한 고민을 양해해 주기바랍니다. 그대들은 언제나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력”이 없었기 때문에 마치 취조 심문하듯이 질문을 던진 이 소인의 행위를 받아 드렸으면 합니다. 그대들의 주님이 지금까지 가장 많이 인용한 마태복음에서 즉, 5장 37절의 말씀처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다시 이 천년 전의 예수의 말을 현대어로 옮겨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시오.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은 기독교입니까? 아니면,


 그대들은 선생님(정명석)을 재림주로 믿는 새로운 교입니까?


 그대들의 말대로 여기서는 양자택일만이 적용됩니다. 회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기회주의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대표적인 상징적 존재였던 부총재와 같은 결론에 도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대들은 진실로 기독교입니까? 지금까지 신학화 해 왔던 선생님을 버리지 않고서는 기독교라는 곳에서는 여러분을 진정으로 기독교인으로 영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한국 기독교 특히 한기총의 편가르기에 정통한 분위기에서 말입니다. JMS는 출발부터 기독교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선생 자체가 기독교를 벗어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발판으로 새로운 재림주의 교, 당신들의 말대로 하자면 ‘성약’의 시대를 열어가려고 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조직은 기독교(특히 보수 장로교의 예식과 진보적인 감리교의 교리 혹은 해방신학적 해석), 통일교, 풍수지리학적 민속신앙 등의 혼합된 양상으로 진행된 것 아닙니까? 종말론의 기대와 함께, 한국 땅에서의 재림주의 출현, 미륵신앙과 정 도령의 신앙에 대한 복합적 요인이 선생을 자극해 온 것 아닙니까? 


 


 선생은 언제나 자신을 기독교의 칭호로 포장하려고 했습니다. 통일교의 신도였으면서도 원리강론은 사용하지 아니 했습니다. 통일교회의 노래도 여과 없이 부르기도 했습니다. 문선명 선생이라고 하면서 문선명 다음의 칭호는 기계적으로 정명석의 입에서는 ‘선생’이라는 표현으로 이어 졌습니다. 거리낌이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통일교도의 표현법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의 존재에 대해 겉으로는 같은 언어로 썼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독교의 모습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만 떨어지는 하나님의 음성, 예수님의 말씀, 성령의 깨우침 등으로 선생님은 특별한 존재로 부각되었습니다. 즉 그는 ‘영지주의자’(희랍어 그노시스)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자신만의 특별한 지식을 강조했습니다. 특별한 관계이므로 다시 오신 구세주였던 것입니다. 종교혼합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은 통일교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기독교 의식을 통한 통일교의 교리의 확산이었습니다.


 


 그대들은 분명히 기독교 간판을 공식적으로 내걸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만이 그리스도임을 믿으십시오. 종말론(말세론)의 해석이 기독교 안에서도 다양합니다. 더욱이 기독교 전체가 하늘의 물리적 징조나 문자적 표현에 그리 민감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극히 상식적인 명제를 그대들은 무슨 특별한 발견이나 되는 양 호들갑을 떨었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있는(그대들이나 통일교도들이 말하는 실패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유일하신 그리스도의 사명으로 오신 성 삼위 하나님의 구속사적 그리스도) 기독교의 신학은 그대들의 부활론을 뛰어넘는 진보적 신학을 이미 언급한 지가 한참 되었습니다. 비유론도 정확한 분석이 될 수 없습니다. 서사비평의 견지에서 성경은 많은 이야기들을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속에서 성경은 다양한 ‘소리’(예컨대 복음서만 하여도 각각의 입장과배경이 달랐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문서와 요한 등의 신학적 견해를 솔직히 분석해 보기나 했습니까? 학문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성경을 이 천 번 이상이나 읽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신다면 이미 문서적으로 확인된 성경의 내용에 대해 그렇게 무지합니까?)들 안에서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를 연주하며 우리들에게 21세기의 진로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환경을 이야기하며 미래의 세대들에게 이상세계의 녹색별의 하나님 나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代案(對岸)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유전자로 비롯된 肉性의 죄악이 토해내는 이 세상의 파노라마를 보면서 그대들의 선생님은 분명히 조작을 한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의 사상적 편린을 긁어모아도 그 자신만의 독특한 성질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들은 극구 부인하겠지만 당장 통일교의 교리의 표절 문제가 드러나는 것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래서 그 표절성을 空論化 시키려고 ‘기독교 복음 선교회’라는 위장 단체를 만든 것 아닙니까? 손오공이 온 천하를 주유했지만 삼장법사의 손아귀에서 헤어나지 못했듯이 그대의 선생은 문선명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니 벗어나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통일교의 색다른 왕국을 정명석화 하려고 한 것이지요. 문선명의 카리스마가 주는 ‘맛’을 그대들의 선생은 어디를 가더라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 동안의 경과 안에서 여러분들은 분명히 여러분만이 공유할 수 있는 특이한 맛을 느끼며 이 단체에 몸담고 있었습니다. ‘섭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심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모두의 용어는 통일교의 공식적 표현입니다. 그대들은 “그래도 좋다. 지금까지 몸바쳐 헌신해온 나의 존재는 어디서 찾으라는 말이냐?”라고 하면서 선생님을 여전히 따를 것으로 판단됩니다. 선생님을 이렇게 절대적으로 따르는데(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부모와 형제 및 애인과 가족 등을 버리고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하면서 이 말씀은 이 단체 모두의 행동지침이 되고 있으며, 선생님을 자연스레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에 치환해 놓고 있음) 기독교의 대전제(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에게 스며들겠습니까?



 넷째, 다시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의 맹목적 순종이 예수님에게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의 狂信이 예수님을 ‘납치’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가두고 새롭게 포장해서 예수님을 이용해서 정명석을 드러내 놓지 않았습니까? 그대들이 이와 같은 목적으로 여기에 오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잘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방종과 침묵과 무지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납치에 대한 부작위범 및 작위범’으로서 말입니다. 즉 인류의 양심을 가진 자라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 것(선생의 비리를 밝히 알리고 해명하게 해서 ‘정의’를 실현하게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한 것(이 단체의 조직적인 거짓 증언-선생님은 간음을 행하지 않았다 는 것 등-을 적극적으로 믿어 여전히 그러한 선전과 홍보의 역할을 한 것. 그리하여 다중의 엠에스들은 영문도 모른 채 거짓을 진실로 오해하고 있음)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묻겠습니다. 기독교입니까?



 기독교라고 믿으시는 왕당파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해오신 것을 보면 하나님을 부인했냐? 예수님을 부정했냐? 찬송가를 부르지 않았느냐(최근 들어 정명석 선생의 구세주임을 매우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개사곡은 공식예배에서 사라지게 됨)? 사도신경을 형식적이나마 고백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말이지요. 바로 그 점입니다. 선생님의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하나님을 믿어 금지식품을 먹지 않게 되고, 미약하나마 환경운동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고, 질서를 지키려고 微動이나마 움직이기도 하고, 월명동 작업에 헌신하기도 하고, 자신의 전세 및 월세를 하향 조정하여 선생님의 성전건축 사업에 동원하기도 한(대표적인 사업이 전국 가정국의 10, 100, 1000 운동임. 1000가정이 100만원씩 10억을 선생님께 만들어 드리자!) 그 모든 일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분석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솔직히 대부분, 헌금이나 노력 무상봉사를 감행한 분들은 선생님을 진솔하게 믿고 행동했다고 봅니다. 물론 어렴풋이 선생의 부도덕을 알고 있는 분들은 뒤로 한 발짝 그 행동의 영역을 뺐을 지도 모릅니다. 양심이 살아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다면 대부분의 신도들의 경우는 기독교로 치장된 선생의 사명을 믿었기 때문에 아낌없이 주기만 한 나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인 신앙의 활동은 이미 기독교의 옷으로 정장된 선생님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이 곳에서의 그나마 건질 수 있었던 열매(극히 제한된 것으로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고 보편적인 양심의 잣대로 살려고 하는 일부의 선하신 성도들의 행위)는 착시작용으로 인하긴 했지만 선생 개인의 카리스마의 배후를 뛰어 넘어 계신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으로 인해(순수한 양심의 빛을 보시고) 가능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도 좋은 열매가 있다고 강변하는 이들은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간음한 선생의 것이라고 우겨서는 안됩니다. 선생은 자기에게 유리한 사람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용했습니다. 순하고, 선량하고, 재력이 있고, 학력이 있고, 명망가라면 어떻게 해서든 공식석상에서 드러내게 했습니다. 고도의 수법이지요. 자신의 치명적 약점을 덮어씌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존재가 여기서는 볼모로 잡혀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마저도 인간의 술수가 만든 함정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생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어느 뺀도롬 하게 생긴 회원이 한 말이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선생님은 잘못이 없다. 하나님이 틀린 것 아니냐? (1997년 당시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승리하니 모두 한나라 당을 찍으라고 독려했지만 그 선생님의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당시의 야당인 국민회의에서 승리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한 말)”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발상을 갖게된 것 모두 정명석 선생의 ‘막무가내식 우기기’와 모사라는 말로 포장된 ‘거짓’이 만들어 낸 신종 신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실과, 즉 좋은 열매가 그대들의 조직에도 존재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전도하려고 한다면, 우선 자신의 정체부터 밝히십시오. 예수님을 핑계삼지 말고,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지 말고 정명석의 능력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그것도 아주 떳떳하게! 하나님을 운운하거나, 예수님을 제멋대로 아전인수격으로 갖다 붙이지 말 것!!!(그 동안 얼마나 많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자기 자신을 ‘결론’으로 마무리지었습니까?)


 


 그대들이 그 동안 이곳의 순수한 양심들을 마비시키고 눈, 코, 귀 등의 언로를 차단시킨 것도 사실은 정명석이라는 천하의 ‘환자’를 메시아로 만든 것 아닙니까? 여전히 그 위력을 과시하면서 말입니다. 이제는 ‘총재’의 직함도 ‘선생님’의 호칭도 쓰지 않습니다. ‘회장’의 이름으로 메시지들은 날라 오는데 그는 아직도 구세주가 되어 있습니다. 질펀한 여성들의 섹스를 요구하면서! 



4. 이제 열매를 통해 나무를 판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최근의 우리 사회의 고문 기술자가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고문 후유증’이라는 말도 회자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고문당한 자의 피학 증세가 심각하여 오히려 고문한 자를 존경하게 되는 심리증세를 말합니다. 일전에 전국을 휩쓸었던 ‘박정희 신드롬’이라든지, ‘이승만 회고전’이라든지 하는 것은 사회심리학적으로 상관되는 것이겠지요.


 저는 이러한 현상을 목도하면서 그 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무언의 정신적 강요 혹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이 곳을 찾는 자들은 바로 이러한 강요된 신앙의 ‘피학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존경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는 중증의 고문 후유증과 같은 증세 말입니다.


 


 정명석이라는 인격과 무모함이 만든 열매는 그 누가 무엇이라고 강변하여도 ‘선생님’이라는 자격으로 도저히 표현조차 할 수 없는 惡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그 나쁜 열매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서 다음의 문구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잘못 기르면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마 12:33);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롬 1:25);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수치스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 대신에 변태적인 것을 즐기며, 남자들도 마찬가지로…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올바른 판단력을 잃고, 해서는 안될 일을 하게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온갖 부정과 부패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사기와 악의에 싸여서 없는 말을 지어내고 서로 헐뜯고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난폭하고 거만하며 제 자랑만 하고 악을 지어내는데 비상한 재주를 가졌으며 부모를 거역하고 또 분별력도 신의도 온정도 자비도 없습니다. 그런 모양으로 사는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법을 잘 알면서도 그들은 자기들만 그런 짓들을 행할 뿐 아니라, 남들이 그런 짓들을 행하는 것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롬 1:26-32)”


 


“그러므로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롬 2:1-2)”



사도 바울의 언급입니다. 그리고 볼테르도 다음의 말을 던졌습니다.



“광신주의자들의 열성이 수치스러운 것이라면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신중해야 하지만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습니다. 2000년은 한 달 보름 남짓 남았습니다. 내 아내의 울부짖던 절규처럼 나는 억울합니다. 그 모든 것을 남에게 전가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생계도 막막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쉬쉬하며 용기없이 저항할 줄 몰랐던 이들에 대한, 아니 내 자신에 대한 울분이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미약한 인간들의 모습 속에서 거짓을 진리로 바꾸고 음란을 뜻으로 돌이키며 여전히 잘 먹고 잘 사는 선생과 그 기생충들 같은 거짓 지도자들에게 하나님! 정의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만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자의 불의(마 23:24)가 이 땅위에 횡행합니다. 가을이 내리는 계절의 훈계를 겸손히 받아들이게 하시고 부족한 이 인간의 연약함을 용서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