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레이디 87년 6월호 여대생 폭로기사

제목: 교주님 교주님 우리 교주님


나는 몇 번씩이나 망설였습니다.이러한 글을 기록해서 공개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죄를 범하는 것인지 두려움이 앞서는 것입니다. 대학까지 졸업하고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내가 호기심이라는 것 때문에 가출을 했고, 부모님은 물론이고 형제들에게 까지 고통을 주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달포간이라는 세월이 로빈슨 크루소의 고도에서의 경험 같기도 하고, 걸리버 여행 같기도 합니다. 나의 체험을 타인 앞에서 공개하기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분들의 권면도 있었지만 1천 3백 명에 이르는 애천교 여대생 신도들에게 다시 한번 냉정하게 자기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경고를 하고 싶어서 펜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있고 ,각자의 처지와 생각에 따라서 최고의 가치를 신앙에 두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 신앙을 생활을 일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신앙을 생활의 전부 뿐만 아니고 인생의 전부로 열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성직자로 계시고 종교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어떻게 보면 신앙을 인생의 전부로 간주하는 사람이어야 할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대구의 H 여대 성악과에 진학한 것도 그러한 나의 성품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목사이신 아버지께서도 보육과나 신학과를 선택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나의 적성에 합당한 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신앙을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 부터 호기심이 유달리 강했습니다.새로운 체험을 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대학 3학년 때입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짝이었던 친구가 대학까지 함께 진학 했습니다. 거의 매일 그와 생활하는 편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부모 형제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의 눈빛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지경입니다. 한마디로 이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지요. 그가 나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인자(가명)야 ,우리 학교에 MS(새벽별)서클이 생겼는데 대단하다더라."
"그게 뭔데?"
"성경 공부하는 크리스챤 들의 모임이야.그런데 굉장히 열심들이야. 그리고 성경공부를 교회와 다르게 한데."
나는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친구와 함께 서클에 가담하면서 정명석 교주가 이끄는 애천교인이 되었습니다. 내가 MS서클에 가담할 때만 해도 15명 정도 였는데 지금은 50명이 넘는 회원들이 무척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헌금을 위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화장품 판매도 했습니다. 나는 처음 강의에서 어떤 호기심을 충족했습니다.
"우리 교주님은 성경을 1천번 이상 독파하셨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으셨습니다. 1997년 7월 14일이 되면 교주님이 재림주가 되어 심판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교주님은 1천명의 천사가 호위하고 있으며 천사와 직접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천사와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귀가 번쩍 뜨였고 정명석 교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나의 선천적 호기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나는 이날부터 서클에 가담하여 천사와 대화해보고 싶었습니다. 천사와 대화를 해 보았다는 회원의 간증을 들었을 때 나의 호기심은 발작으로 변할 정도였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예배를 보고 강론을 들었습니다.
또 1일 생활 수준표라는 것이 있어서 하루하루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아야 되었습니다. 이것은 MS회원들의 생활 지침서였고 많은 회원들이 공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현재 뿐만 아니라 과거의 생활까지 반성이 되었습니다. 회원들의 학교성적이 향상되었습니다. 하루의 시간의 쪼개어서 그 순간순간을 최선의 삶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의식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왔고 성적의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머리에 손이 가고 얼굴화장에 손이 가는 것보다는 책에 손이 가는 것이 성실한 삶입니다.
학생시절 몸치장보다는 공부하는 것이 더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가치가 높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성실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3개월 만에 나는 MS서클의 맹렬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많은 갈등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대할 때마다 죄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재림주 예수님이 오시는 날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고 권면하며 살아야 한다."
예배시간 때마다 항상 신도들에게 설교를 하시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명석 교주님을 재림주로 모시는 입장이 되었으니 괴로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의 마음이란 묘한 것이었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해야 할 아버지의 인자하신 얼굴이 위선의 이중인격자로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식사를 할 때 온 식구들이 머리를 숙여 기도를 합니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전혀 다른 하나님을 모시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재림주가 신앙의 대상이고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예수가 신앙의 대상인 것입니다. 식사를 하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볼 때 울컥 죄스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열 길이나 되는 물 속은 알아도 한길도 모르는 사람의 마음속은 알아볼 수 없다는 옛 어른의 말씀이 실감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나의 MS서클 활동은 무척 재미있었고 정명석 교주님이 제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목사의 딸이면서 아버지의 신앙과는 다른 애천교의 신도가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신입교인에게 30개론이라는 교육과정을 거치고 신앙고백을 하면 통과번호를 부여 받게 됩니다. 이것은 교인이 될 자격을 부여 받는 것이고 주민등록과 같은 것입니다.
30개론은 애천교회의 교리이며 강령입니다. 이름으로 보면 기도교지만 교리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명석 교주님의 철학과 이념을 체계화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정확한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쉽게 애천교회의 30개론에 몰입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여기에는 우주를 바라보는 방법, 사후세계에 대한 청사진, 미래세계에 대한 동경, 과거에 대한 가치관 정립 등 새로운 철학 등입니다. 신입 회원들은 누구나 신비와 경이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나는 ms서클에서 특강 세미나를 받고 더욱 분발했습니다. 방언, 방서, 초혼, 입신, 천사와의 대화를 해보고 싶은 충동 때문이었습니다.서클에서 자주 산상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나는 학교 시험을 포기하고서 교주님이 20 여년 기도를 했다는 대둔산과 용문산에 가서 산상기도를 하였습니다. 철야기도는 자주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맹렬 회원이 된 것은 나의 성격 탓도 있었지만 친구와의 보이지 않는 경쟁심이 발동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여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을 버리지 못하는 숙명적인 존재인가 봅니다. 좋게 얘기해서 경쟁심이고 솔직한 표현을 한다면 시기심 아니면 질투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친구는 자주 방언을 하고 방서를 합니다.
교주님이 천사와 대화하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간절한 호소를 계속하면 성령이 내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대신하는 것이 방언입니다. 방언은 인간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어떤 사람은 그냥 소리만으로 하고 어떤 사람은 중국어나 영어 아니면 소련어로 방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신세계에는 신비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소련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언을 할 때에는 소련어를 유창하게 합니다. 옆에서 듣는 사람도 방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방언을 해석하는 전문가가 있습니다. 나는 친구처럼 방언과 방서를 실현해 보이기 위해서 서클에서 기획한 일은 모두 따랐습니다. 그래도 나는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야, 졸업하면 서울에 가서 교주님의 가르침을 받아 보지 않겠니?"
이러한 제의를 받았을 때 가슴이 뛰기 시작 했습니다. 교주님의 얼굴을 직접보고 천사와의 대화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 때에 결심을 했습니다.마음을 작정하고 보니 졸업이 기다려 지는 것입니다. 어머님이 나의 이러한 변화를 읽으셨던 모양입니다.
"얘야, 대학 졸업하면 중학교 교사 자리를 아버지께서 말씀해 놓으신 모양이더라. 그리고 결혼도 생각해야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깊숙이 애천교회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머님의 걱정스러운 충고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나는 긴장하고서 졸업과 동시에 취직자리를 알아보러 간다는 말을 남겨놓고 서울로 왔습니다. 강남구 잠원동에 있는 애천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첫날부터 철야기도에 참석해서 천사와의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는 방언과 방서 그리고 천사와의 대화를 체험한 사람들이 증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어깨에는 은빛같은 날개를 달고 공중에서 내려온 천사와 마주 쳤습니다. 너무나 감격스럽고 기뻐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정명석 교주님이 다른 천사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천사와 나의 팔뚝에 도장을 찍어주면서 영원한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주변에서도 박수를 치고 할렐루야를 소리 높여주었습니다. 나는 더욱 타오르는 정열이 꿈틀거리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고 눈물이 폭포수처럼 솟아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나에게도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는 희망을 가져보았습니다.
바로 이때 정명석 교주님과 한 지붕에서 생활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교주님은 총각이고 미남이었습니다. 40대 노총각으로서 하나님의 계시까지 받은 한국의 예수와 식사를 함께 하고 한 지붕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춘기적인 번뇌가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의 나로서는 최고의 가치, 최고의 선이 바로 교주님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나는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교주님, 교주님, 우리 교주님 나에게도 은총을 내리셔서 천사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요. 방언과 방서를 마음대로 하도록 은혜를 베풀어 줄 수 없는가요."
이러한 나의 기도가 통달되어 교주님을 대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교주님 방에는 두 명의 여자 분이 있었고 한 사람씩 들어가서 면회를 했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첫번째 질문이었습니다. 당황했습니다.
'당신은 교주님이시다'라고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머뭇거렸습니다. 이때 옆에 있는 여자들이 중얼거렸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들어보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메시아 이시지요, 메시아(구세주)"
나는 더욱 당황했습니다. 학교에서 서클 하면서 30개론을 배울 때는 참신하고 새로운 목소리였는데 정명석을 메시아라고 대답하기에는 머뭇거려 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사명을 부여 받고 이 세상에 왔다. 20여년간 산상에서 기도하면서 매일 1천 여명의 천사로부터 호위를 받았다. 1997년 7월14일에는 내가 세상을 심판하리라. 교회가 너무 타락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셨고 나더러 구제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구세주다."
눈을 부릅뜨고 일사천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떤가? 이제 내가 누군지를 알겠는가?"
"네, 알겠습니다"
"다시 말해봐. 내가 누구인가?"
"메시아이십니다"
"이제야 아는군. 나를 국내 교계에서 시끄럽게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파도처럼 일어나는 부흥의 물결을 막아내지 못할 거야. 이제 부흥의 전사가 되어 자기의 전부를 바치는 일꾼이 되어다오. 그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너를 반길 것이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에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되었습니다. 교주는 가까이 오라 하더니 나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다리와 엉덩이에 손이 갔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밀쳐버렸습니다. 그의 얼굴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1천여 여대생 신도들이 모두 통과식에서 이러한 과정을 치루었다는 생각이 미칠 때에는 분노 같은 격한 감정이 솟구쳤습니다. 그의 손은 다시 젖가슴쪽으로 더듬어왔습니다. 어쩌자고 나에게 이러한 모욕을 가하는 것일까? 이것은 아담과 이브의 본능적인 원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가슴은 다시 떨려오고 얼굴에는 어느 사이 땀방울이 맺혀있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앙 이전에 윤리라는 고귀한 가치가 있고 ,도덕이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망각되었을 때 죄악은 선으로 둔갑을 하게 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아이히만에 의해 유대인 6백만명씩이나 학살 되었을 때도 인간의 윤리와 도덕이라는 최고의 가치가 망각되어서 일어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감성보다는 이성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무방비 상태가 되어갔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두눈을 또렷하게 뜨고 있는 여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라는 것은 이상한 동물입니다. 처음 당할 때가 문제지 한번 손이 닿은 다음부터는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거부감이 무디어지는 것입니다. 춘희가 춘희로 변신하는 과정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인의 춘희가 되어버린 모습만을 보고 우리는 돌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춘희의 마음의 흐름이 갈대와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춘희도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평생을 두고 이렇게 대담해질 수 없었습니다. 몇 번씩이나 그의 손이 나의 터질 듯한 젊음의 표면에 와 닿을 때까지도 전혀 감각이 없었으니까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나는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의식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이 납니다. 사람은 적응력이라는 편리한 무기가 있습니다.로마에 가면 로마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항상 거부하면서 아웃사이드로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웃사이드를 고집하는 것은 고독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미 그러한 용기를 상실한 처녀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확실히 나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내가 타락하였다는 원죄의식은 전혀 없었습니다. 만약 원죄의식이 발동하였다면 나는 소리라도 질렀을 것이고 아니면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로 표현되는 줏대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고비를 넘겨야 해. 이것을 참아낼 줄 알아야 하는 거야. 이렇게 하면 서로가 마음을 놓고 영과 영이 통할 수 있는 거야."
아마 이들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30개론을 통과했고 교주와의 교리문답을 해서 개통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1시간 가량 그렇게 친교를 하고서 물러나왔습니다.
나의 다음으로 또 다른 처녀가 들어갔습니다. 바로 옆방으로 안내되었습니다. 방에는 다섯명의 처녀들이 앉아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대학생들이었고 한 사람은 휴학생이었습니다.
"교주님과 문답을 하셨어요?"
방에 있던 여대생 하나가 웃으면서 묻는 것이었습니다.
"네, 문답했어요."
"시원하시지요. 저는 메시아와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반갑든지 염치불구하고 껴안았었지요. 교주님은 대단한 능력과 직감력이 있으신 분이세요."
성격이 활달해서 그런지 무척이나 많은 이야기를 하여 주었습니다. 나는 그날 저녁, 그곳에서 어울려서 잠을 자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싱숭생숭했습니다. 새로운 경험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찌해서 정명석 교주 앞에는 처녀들이 그토록 많이 모여들고 있는 것일까? 처녀의 몸에 손을 대는 행위는 신사적인 행위가 아니지 않는가? 여러 가지로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벌써 집을 떠난 지가 달포가 되었습니다.
'어찌할 것인가?'
나는 갑자기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전화를 받자 입을 열지 못하셨습니다. 이미 소식을 듣고 국제종교문제 연구소에 신고를 해놓았고 신문광고까지 해서 찾으실 작정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세요. 절대로 딴 일은 없었어요."
"그래 사랑하는 내 딸아, 나는 하나님께 너의 온전함을 위해 밤새도록 기도했단다."
아버지는 즉시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그리고 국제 종교문제연구소로 같이 갔습니다. 탁명환 소장과 아버지는 잘 아는 사이었습니다.
"1980년부터 추종자들과 함께 애천교회를 만들어 포교를 하면서 많은 의혹과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여대생들이 수치를 무릅쓰고 찾아와 증언한 내용을 전부 녹음해 두었습니다. 정명석 교주는 종교적으로도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여성들에게 이상한 행위를 해서 전정호소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젊은 교주가 독신으로 있으면서 많은 여대생을 대상으로 포교를 하고 있으니 피해자가 많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1945년 2월 17일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정팔성씨의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나 고향에서 국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신비적인 현상에 관심이 커 당시 유년주일학교를 다니면서도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워 춘향이 신을 부르는 장난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산으로 기도원을 찾아 다녔는데 20여년간을 용문산에서 기도생활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젊음을 보냈던 사람입니다.그는 40일 기도뿐만 아니고 70일기도도 거침없이 해냈다는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통일교였으며, 통일교 산하의 국제 승공연맹 강사요원으로 발탁되어 통일교 포교와 반공활동을 하면서 통일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여성의 유방과 그 이상의 곳에 손을 댔다고 합니다. 문제는 피해자들이 법적인 고발을 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피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교세가 급격히 팽창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포교대상도 전국의 대학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적 감수성이 예민하고 센티멘털한 여대생만을 주대상으로 하여 포교하는 방식이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용기 있는 여대생이 "나는 이렇게 당했다."하고 폭로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 역시 몇 번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익명으로 쓰는 글이라 하더라도 그 이상으로 일어났던 하룻밤을 솔직하게 기록하지 못하는 나약함을 독자들은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교주님에게 이러한 말을 남겨 놓고 싶습니다.
"교주님, 교주님, 우리 교주님.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교주님의 말씀대로 한국의 메시아라면 처녀들의 손이나 엉덩이를 주물러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일부 교계가 너무 진부하고 상업주의로 흐르고 있어서, 젊은이들은 새로운 얼굴과 새로운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1천 3백회나 독파하셨다면 그것은 결코 인간의 뜻은 아닐 것입니다. 세계역사상 보기 드문 일 아닙니까?
그러한 교주님께서 여대생들과 혼숙을 하면서 메시아임을 주장하시는 것은 무서운 이율배반입니다. 공공적인 장소가 하필이면 교주님의 숙식하는 곳이어서 누구나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주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구세주라고 자칭하고 있는 통일교 교주 문선명 선생께서도 결혼해서 아이들과 딸을 17명씩이나 낳고 있지 않습니까?
계룡산이나 지리산에 가면 수백명의 교주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교주들에게 비판을 하거나 시비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종교의 자유와 포교의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주님에 대해서 이렇게 간곡히 말씀 드리는 것은 용화교 교주님은 교리도 정리하고 교세도 확산하며 잘 지냈어요. 헌데 하얀 노인 어른께서 무슨 힘이 그렇게 남아 돌았는지 여수좌들을 50명씩이나 건드리는 통에 용화교는 하루아침에 박살이 났던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옛말에 집안의 여자를 다스릴 줄 아는 사나이는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종교의 자유가 있고 신성한 것이라고 해도 도덕적으로 비판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또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지요. 교주님의 목소리는 신선한 목소리일 수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계에 살면서 젊은 지성인들이 새로운 목소리에 갈급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40년간 광야를 헤매이면서도 새로운 목소리에 모두가 새 생명을 얻었지 않습니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여신도의 엉덩이에 손들 대지 않았습니다.
교주님, 교주님, 우리 교주님, 이제 새롭게 거듭나셔서 이당에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 주십시요. 이렇게 두 손을 모아 기도 드립니다.아멘"
저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몰라도 커다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잘못 탐닉했더라면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 일생을 허망한 구덩이에 빠져 헤매일뻔 했음을 솔직히 고백해 드립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사회에 불건전한 교주님들이 다시는 태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너와 나의 일이 아니고 우리들 모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