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MS와 교류를 하게되면서 JMS의 교리나 특성들을 배우고 그 분위기에 익숙해 질 무렵 자연스레 이러한 질문이 생겼다.

이 집단의 욕망은 무엇일까? 구체적인 욕망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일반적인 회사는 기업의 이윤추구가 욕망일 것이다. 회사의 브랜드, 이미지도 욕망을 어떻게 구분하고 분명히 했느냐에 따라서 만들어지고 달라진다. 개인에서 집단, 위치 그 구분에 따라서 다양한 욕망들이 존재할 것이다.

JMS의 주축, 정명석 총재, 일명 선생님의 욕망을 한 번 생각해보자.
선생님의 가장 뚜렷한 점은 새메시야로서의 자기정체성 그리고 각인으로 보인다.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너에게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각인시켜준다. 아침에 눈 뜨고서도, 하늘에 구름이 있건 없건 선생님 때문에, 덕분에, 잠들고 꿈에서 조차 모든 것들로 그 정체성을 각인 시켜준다. 이 모습은 당연히 훈계(하루에 기본적으로 두, 세차례 새벽잠언, 설교문 등 공식 문서작성 및 전달, 개인 메시지, 구역 메시지 전달 등)를 하시는 모습에서나 혹은 칭찬을 하는 모습에서도 나는 새메시야이다. 하나님이다라는 메시지를 각인시켜준다. 또 섬세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서, 유쾌한 사람으로서, 성실하고 창의적인, 천재적인 사람으로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캐릭터를 각인시켜준다. 실제로 나이도 많고, 한 교단의 총재이자 새메시야의 위치이기 때문에 업무량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거의 멈춤없이 섭리인들(교인)과 설교나 잠언 등을 통해 수시로 대화를 시도한다. 대화보단 모니터링이 어울리는 표현같다. 이런식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신도들로 확인 받는 노력이 가장 뚜렷하게 눈에 띈다.

선생님으로 부터 전달되는 잠언이나 설교문 또는 목사님들을 통한 전달말씀을 보면, 적어도 내가 접했던(약 8개월간) 내용들에선 훈계가 잦았다. 훈계 뿐만이 아니라 칭찬도 분명 있다. 하지만 훈계를 기피하거나 조심스럽다는 느낌이 들진 않는다. 훈계든 칭찬이든 일반전달사항이든 분명 메시지에는 섭리와 구원에 대한 메시지가 함께 나열되어 있지만, 선생님이라는 존재의 각인과 신도들의 필요 상황인식을 견고히 한다는 것이 눈에 띈다. 이 모습은 구원자라는 신령하고 영적인 모습이기 보단 사장님의 모습으로서, 관리자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인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잘 못하고 있다. 기준은 이 것이다. 정신차려라라는 일상의 상하관계에서의 볼 수 있는 압박적인 모습들이 생각된다.

혹 이러한 다그치는 듯한 모습에 대해 바울서신을 얘기할 수 있다. 바울이 훈계의 맘을 담아 쓴 것과 동일한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사역 초창기의 문서들, 고린도서, 갈라디아서에는 그러한 면이 다분히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바울의 기본적인 성향과 처했던 곤란한 상황들을 볼 때,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다. 하지만 바울의 신앙이 더 깊어지고 성품이 갈려진, 그 하늘방문 이후인 사역 후반을 보자. 에베소서를 보면 처한 곤란한 상황은 더욱 고되졌지만 단지 달콤하고 단순하고 양같은 모습으로만 나타내어진다. 다른 서신들에서의 사도들의 모습들도 보다 더 가슴이 아릴정도의 단순함만이 강조되는 것과는 다르게 선생님의 잠언의 훈계의 성격은 일명 십자가사건(감옥출소)이 지나갔음에도 여전하다 혹은 과해진 것은 생각을 해볼 만한 것이다.

이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정명석 총재, 선생님은 현재 JMS의 섭리인들로부터 희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JMS와 관련이 있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알 필요가 있다. JMS입장에서의 선생님은 이런 존재다. 기존 기성교회 목사들과는 다르게 통찰력이 있다. 그 통찰력으로 성경풀이를 입체적으로 해주었고, 새메시야라는 존재로서 예수님같은 섬김의 지도력을 몸소 실천하시는 분이다. 구원에 이루신 자이다. 쉽게 말해 예수님의 영을 받은 존재, 재림예수 위상의 인물인 것이다. 당연히 한명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이 희망이요 욕망이라 할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성경으로 보여주시는 영혼구원의 희망, 욕망과 정명석 총재, 일명 선생님의 영혼구원의 희망, 욕망은 엄연히 다르게 다가온다. 그 말과 보여지는 것이 너무나도 차이가 나고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부패한 어느 정부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부패한 정부의 주요 인물들의 집단적 개념이자 욕망을 생각해보자. 1등이 되야하고 삶은 생존이고 이겨야 한다는 승자 독식이라는 개념. 그리고 인간답게 자신의 삶을 자신이 만들 수 있도록 하자라는 두 개념 중, 어떤 것이 그들의 기본적이며 지배적인 욕망이겠는가. 바로 승자독식 개념이 부패한 정부의 주요인물들의 집단적 개념이라는 것을 봐왔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위의 욕망으로 가득찬 어느 집단에서 인간답게 자신의 삶을 만들 수 있도록 하자라는 말을 하거나 정책을 발표할 때는 스스로의 욕망을 속인 것이고, 이루어 지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즉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가진 욕망과 해결법이 동일한 것인지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성경을 보자. 모세 당시 언약과 율법을 받던 때는 법의 정신과 사랑이 사람들에게 분명히 전해지고 설명되어졌다. 아예 신명기자체가 율법을 풀이해주는 모세의 설교(고별설교의 위상)였다. 모세는 율법을 읽어주고 설명해줄 것을 후대에 당부했지만 다음 세대인 여호수에 때부터 그 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생각해보자. 이스라엘 역사상 긍정적으로 평가 받던 몇 시대, 몇 번 율법서의 전체도 아니고 부분들이 발견되어졌다. 또한 기존의 악습을 고치려 노력했던 왕들의 시대임을 생각해보자. 그럴 때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비극들을 이해하게 된다.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 랍비들이 성경을 정리하고 부터는 또 어떠한가. 시간이 지나 예수님 당시까지 탈무드와 온갖 조항들이 바른 신앙이라는 명분하에 제정되어졌고, 실제로 백성들에게 주어졌고 지켜야 했다. 이러한 조항들은 십계명과 율법서의 분량과 비교를 해보자면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모세 당시 주어졌던 십계명과 율법의 본래 목적과 정신을 이은 것은 사실일까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것은 없었을까 살펴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질문을 던저보자.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과 율법서기관들이 가진 개념과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크게 바리새파 사두개파로 나뉘기도 했지만 두드러지는 것은 신앙생활 내에서 갈려지는 계급화였다.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구분함은 기본이요. 이스라엘 백성 내에서도 법과 질서로 경제적인 면까지도 뚜렷하게 계급화 시키고 그것을 정당화 시켜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계급간의 차이와 차별에 대한 태도도 다르게 나타나게 되고 계급간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차별도 심화된다. 그러니 계급의 극심한 차이로 이방인들은 지옥의 땔감이라 불리며, 전도의 대상으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계급적인 욕망으로 가득찬 법과 제도 속에서 율법의 본래 정신을 찾는 다라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라고 예수님의 질문에 정답을 얘기했던 율법학자도 결국엔 이방인을 사랑하라는 명령엔 굴복할 수 없었다.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자행되던 계급화 사회에서 낙오자나 정죄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시고 부활함으로써 예수를 따르던 무리 내에서 발생하는 율법의 정신과 반하는 인간의 욕망을 근본적으로 좌절시키고 제자들을 진정 사도로서 각성 시키셨다. 예수님이 보여준 정신과 욕망은 섬김과 희생이었다. 또 다른 계급화된 사회의 구축이 아니었다.
이것을 제자들에게 각인 시켜준 것이 십자가 사건이었으며 계급화된 사회에서 제물의 수준으로 존재하는 끌려가는 어린양이로다라는 예언의 성취가 아니었겠는가. 이 정신과 욕망을 이어 받은 사도들에게 죽음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영광스러운 행위였으며 그들이 보여준 갈려진 품성과 양 같은 모습들은 그 것의 결과다.

정명석 총재, 선생님은 자기정체성, 즉 자신을 나타내고 표현해주는 특성이 뚜렷하다. 그렇다면 그 표현된 행위들에서 나타나는 정신과 희망, 욕망은 무엇인가? 분명 섬김, 희생, 사랑같은 것을 얘기한다. 그리고 세계선교를 외치며 활동력도 얘기한다. 하지만 동시에 신도들이 잘하지 못하면 새메시야가 또 희생을 하게 된다는 수비적 훈계들은 무엇으로 봐야하는가. 예배 때 CCTV로 여러 교회를 돌려가며 실시간 모니터링 반응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봐야할까. 아니면 지나친 관리 감독으로 봐야하는 것인가.
JMS의 교리에 천국에 가면 매우 구체적으로 10개 이상의 차등급이 있는 것을 알 것이다.(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도 등급이 많다.) 물론 천국에서 받는 상은 크고 작음은 있고 순교자의 상은 또 특별하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책에서 볼 수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인도적 차원의 문제이다. 하지만 JMS에서는 교리적으로 천국에 가기 전인 지상교회에서 부터 등급이 나누어져 있다.(JMS를 접하기전의 성관계 유무, JMS교인과 결혼했는지 유무 등 더 있다.) 그리고 무한대로 자신의 신앙레벨을 올릴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 신앙레벨을 높일 것을 사실상 강요하고 있다. 이것은 다단계의 상위등급과 그 보상심리와 같은 것이 아닌가. 과연 이러한 현상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의 정신에 부합되는 현상인가. 내가 보기엔 역행으로 보인다. 다단계 회장님이 다이아몬드에서 브론즈 등등 등급을 만들어내고 내부고발 및 성과에 대해서 지독하게 관리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저히 내 머리론 이해할 수 없다. 이 선생님의 욕망은 새메시야로 불리면서 탈없이 또 성공한 새메시야로 지내는것이 욕망일 것이다. 신도들은 그저 미안한 감정도 들지 않는 도구일 뿐이다. 거짓에 취한자. 종교 다단계 회장님이시다.